
트리니티 캐스트 | TRINITY CAST
By Hojune Jang
사람이 거듭나 예수를 주로 믿고, 그런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게 되어가는 일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벧전 1:22-25). 성경은 이를 가리켜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엡 2:10; 골 1:10; 살후 2:17).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라, 이 '선한 일'을 위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정욕은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습니다. 누구든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것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말씀과 연합한 자들은 그 말씀과 더불어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히 4:2; 요일 2:17).


예수부활의 필요 (고전 15:14) | The Necessity of the Resurrection (1 Cor 15:14)
예수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종말을 향해 치닫는 온 우주 역사의 핵심 축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역사가 의미가 있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예수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차 있게 될 생명의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예수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과 신자의 거룩한 순종의 삶이 이 헛되지 않는 것은 성경이 기록하는 대로의 예수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 우리가 믿는 복음, 우리가 순종하는 복음은 예수부활이라는 이 한 사건이 있었기에 지금도 계속 전파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계속 믿어야 합니다. 지금도 계속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 부활은 예수의 삶과 사역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었음을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있은 이후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고전 15:16).
성경에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의 예수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믿음이 계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가장 불쌍하고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한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예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한갓 인간적인 소망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고 그런 헛된 소망을 붙들고 사는 신자들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자였을 거라고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하지만 예수는 부활했습니다. 부활의 첫열매로, 오는 모든 부활들을 위한 부활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복음도 헛되지 않고습니다. 우리의 전파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우리는 더이상 죄의 권세와 심판아래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계명을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경건도 헛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율법과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신원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확증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의미의 중심에 자리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바울의 이 증거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믿음과 증거의 제목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전무후무한 예수의 부활(고전 15:20-23) | The Resurrection without Analogy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면에서 예수의 부활과 비슷해 보이는 여타의 부활사건들은 예수의 부활과는 전혀 차원과 성격이 다릅니다. 여타의 모든 부활 사건들은 하나같이 예수의 부활을 대망하고, 예수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고,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 부활을 위한 리허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부활의 권세를 힘입은 이적과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예수의 육체의 부활과 동일하지 않고 비견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부활의 첫 열매요, 모든 부활들의 부활이기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로마서 6:9).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고전 15:20-23).

예수의 부활, 삼위 하나님의 역사(롬 6:4) | The Resurrection, the Wonderful Work of the Triune God.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동일하게 성자와 성령 하나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세 위격이 한 본체로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다는 성경의 진술 역시 합당합니다. 이를테면 골로새서 2:12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24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고 합니다. 같은 책 13:30 역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케아 신앙고백과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정통 신앙고백에 따라 엄밀하게 ‘예수는 성부의 영광과, 성자 자신의 능력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 예수 부활은 과연 삼위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고, 죄인인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계속해서 이 팟캐스트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삼위일체에 대하여 정통신앙고백에 따른 성경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책을 한 권 소개합니다. '복있는 사람'에서 출판된 마이클 리브스의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원 제목이 ‘Delighting in the Trinity’인 이 책은 본인이 번역하는 특권을 누린 책들가운데 입니다. 그러나 제가 번역한 책이라 추천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이 책의 판매는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번역자로서 책의 내용에 대해 알기에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강력하게 추천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를 이룬 주체를 각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고 일관되게 증거합니다. 니케아 신조와 같은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기독교 신앙고백과 원리를 통해서만 성경의 이런 일관된 증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이해할 뿐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복음의 하나님, 우리의 구원과 구원받은 우리의 거룩한 삶의 토대와 능력이 되시는 새생명의 하나님이신 것을 맛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4)
부활로 도래한 종말-은혜와 구원의 때(고후 6:2) | The Resurrection of Jesus, the Sign for the Favorable Time
부활하신 예수는 사십일을 이 땅에 계시며 사도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눅 24:46; 행 1:3).
이렇게 준비된 사도들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의 메시지에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와 회개의 당위성이 연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이 두 사실을 연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사도들이 증거할 제목이라고 하십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45–48)
과연 베드로와 사도들은 충성된 증인들로 드러납니다. 공회에 잡혀간 사도들이 담대히 설교한 내용 역시 승천하신 주님의 명령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회개할 때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행전 5:30–32)
무엇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시고 하늘로 높이셨다고 합니까? “회개함과 죄사함”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임금이 여기 계십니다. 요나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여기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 당신에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를 임금과 구주로 모시는 삶으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2
이르시되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아멘.

사망을 이김(엡 2:4-6) | The Death of Death
지난 번 팟캐스트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타락이래로 온 우주의 역사는 예수부활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로 갈립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부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부활의 당사자이신 예수는 이 시대를 가리켜 마지막 때, 말세라고 하시며, 회개를 명령하셨습니다.
회개는 돌이킴입니다. 180도 돌아서는 것입니다. 정 반대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지옥을 향해 가던 길에서 돌이켜 천국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던 길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웃을 위해 사는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이 세상의 풍조와 가치와 이 세상에서의 안위를 위해 살던 삶에서 돌이켜 오는 세상의 영원한 나라의 질서와 가치와 원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구주와 주가 되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준행하며 그와 교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사는 것입니다. 주의 왕되심과 다시 오심을 입술과 삶으로 전파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함으로 남은 죄를 도말하며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초대교회때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함으로 그와 교통하는 연락와 안위를 누립니다.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머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의 지체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움직이십시오.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실 때도 그랬고,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내내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과 음료는 다름아닌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의 지체된 나 역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의 지체된 증거입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성전삼고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로 그와 더불어 진리안에서 행하기를 힘쓰는 하나님 나라의 친백성을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3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0:31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아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인치는 부활(고린도전서 15:3-4) | Jesus' Resurrection, Confirming the Value of His Atoning Death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부활의 빛을 통해 제대로 이해할 수록, 그의 부활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지식의 선순환이 우리의 일생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사랑에 자라가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의 부활이 이런 사실들을 인치는 하늘 법정의 선포요,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하늘과 당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임금과 재판장이시라면, 이제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아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그를 만물의 후사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의 홀은 의로운 홀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보좌는 영영하며 그의 통치의 연대는 다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의 복음의 홀이 내밀어져있는 지금 그의 통치아래로 들어오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마추십시오. 그를 믿음으로 여호와께 피하십시오 (시편 2:12).

신자의 삶,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은혜의 선물(에베소서 2:1-10) | The New Life, Made Alive Together with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역사가 이미 이루어졌고, 또 그의 다시오심과 더불어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생명 가운데 이런 ‘이미’와 ‘아직’의 간극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이 때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날마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한 말씀을 준행함으로 모든 일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이 일을 이루어가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아들이 많은 형제를 가진 맏아들로 드러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8–29, NKRV)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거룩입니다. 말씀으로 구별된 삶입니다. 부활의 새생명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예수의 말씀과 역사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형상, 그것을 본받도록 우리를 부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 놀라운 일을 위해 수렴되도록 우리 안팎에서 행하시는 우리 구원의 주체, 그리고 이를 통해 날마다 자녀들의 마음에서 찬미의 주제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분리될 수 없는 구원의 단일한 역사 | Christ' Cross and Resurrection, Inseparable Works of Salvation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NKRV)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그가 부활하신 실제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의 부활을 생각할 때 역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인친 우리의 의의 확증으로서 부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분리된 두 가지 사건이 아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한 단일한 구원역사로 이해되는 것이 정당하고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씨앗과 같습니다. 이미 그 안에 부활이라고 하는 신비한 형체를 다 품고있는 앗말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렌즈를 통해서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라야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와 능력을 모르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된 일들(딤전 3:16) | What the Resurrection Achieved (1 Tim 3:16)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죽은 메시야가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죽었던 그의 육신이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이 역사적인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구속의 역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제자들에게 온전히 증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이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일들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의 부활과 신자의 거룩(살전 4:3) |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 Godliness (1 Thess 4:3)
예수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부활 또한 없어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믿고 죄에서 돌이킬 때 그 회개가 하늘 법정에서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의롭다 선언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속 사람이 즐거워하고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로 부터 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 땅에서부터 참 자유와 희락과 경건의 신비를 누리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이후로 열거되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그러므로 남편들아” “그러므로 아내들아” “그러므로 자녀들아” “그러므로 아비들아” “그러므로 상전들아” “그러므로 종들아”....와 같이 시작하는 계명은 한갓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교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 맞다면 이런 계명들은 이 땅에서 신자들이 살아갈 유일한 삶의 내용과 원리입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이런 복음의 계명이 그리스도의 권세와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참 자유를 따라 내 속에서, 내 가정안에서, 내 교회안에서, 내 일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자궤감을 느끼도록 하는 한갓 고상하고 피상적인 교훈이 아닌 우리를 위해 난 길로 드러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단없이 걸어갈 신자의 복된 여정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선구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들어가신 하늘 지성소로 난 길로 드러납니다. 이 길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승리의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김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가운데서 행하도록 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 "It is Finished!"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9:30, NKRV)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신 말씀은 일곱마디입니다. 다른 때에 하신 말씀들도 소중하지만, 특별히 십자가에 달리신 채 하신 말씀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일 뿐 아니라 참 사람으로 이 땅에 계시면서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다 이루신 것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 그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함께 알아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눅 24:46) | The Character of Christ's Death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누가복음 24:46, NKRV)
성경의 모든 책들이 갈보리 무에 달려 죽은 예수의 죽음을 향해 달음박질합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세상의 종말을 향해 치닫습니다.
왜 이토록 그날 갈보리에서 죽은 예수의 죽음으로 수렴되는 것입니까? 그 죽음은 여느 인간의 죽음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천년 전에 일어난, 그것도 내가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머나먼 그 언덕에서 일어난 예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죽음 (눅 23:46) | "Blessed are the dead who die in the Lord....”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참 신자에게 육신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합니까?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맞이해야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14:13).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2:1) | "...so that you may not sin."
여덟번째 에피소드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하려 함이라" 입니다(요일 2:1).
교인들 대다수가 신자의 죄에 대해 본성적인 이해를 갖고 살아갑니다. 이런 본성적인 이해는 크게 두 가지 태도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운명론적인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내가 죄 범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떤 모양으로 드러납니까?
요한일서 1장 전반과 2장의 문맥을 통해 우리는 이와 관련된 오늘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오늘날 교인들에게 만연한 죄에 대한 본성적 이해에 대한 묘약이 됩니다.

우리의 대언자 의로우신 예수 (요일 2:1) | Our Advocate, Jesus Christ the Righteous
우리의 죄를 짊어진 우리의 죄를 속하는 대속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대속제물된 그의 십자가 희생이 그에게 전가된 모든 죄의 빚을 하나님 앞에서 다 갚았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 전가된 죄의 주체인 나의 의롭다 함을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하늘로 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 우리를 위해 중보/간구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4, NKRV)

대속물로서의 죽음 (마태복음 20:28) | Christ's Death, An Atonement for Sin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책을 갚기 위한 속죄제물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NKRV)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즉 속전으로 주기 위함이라고. 속전이 무엇입니까?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치르는 값입니다.
무엇으로 값을 치르셨습니까? 자기 목숨입니다. 인자가 되신 하나님의 목숨입니다.
그렇게 얻은 자유로 더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않고 우리의 삶과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종노릇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1서 3:10, NKRV)

우리의 구원자 예수 II | Our Compassionate, Willing Savior II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있었습니까? 선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죄인인 당신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버린이가 있습니까? 원수된 당신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 당신의 죄책을 대신 짊어진 이가 있습니까? 당신이 죽어야 할 죽음의 자리에 대신 메달린 이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생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당신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당신을 영원한 생명가운데 살도록 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예수를 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따르십시오. 참 자유를 얻으십시오.

우리의 구원자 예수 | Our Compassionate, Willing Savior
그리스도께로 가십시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넘치도록 있습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엡 3:19; 골 1:19; 2:9)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만이 아닙니다. 지금 그렇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 충만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한 충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차고 흘러 넘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충만함가운데 모든 자원함으로 이 땅을 사셨고 지금도 동일한 충만함과 자원함으로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심으로 우리에게는 더 큰 유익입니다. 성령을 보내사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시에 한 사람에게 하시는 것처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로 그와 같은 길을 걷되 넉넉히 걷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너머의 즐거움을 바라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마음먹으신 것처럼, 그를 따르는 우리도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넉넉히 이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넉넉히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자원함과 기쁨가운데 살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고난의 잔을 성부으로부터 기꺼이 받아 마시되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받아 마신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가운데 하늘 아버지의 섭리의 잔을 기꺼이 받아마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가 우리의 맡형으로, 하나님의 맡아들로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가라지와 알곡이 혼재하는 이 땅의 교회 | The Church of Wheat and Tares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거기에는 항상 참 신자와 유사 신자들이 섞여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하십니다. 알곡은 거두어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모아다 불사라는 때인 최후의 심판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하십니다.

먼저 비용을 계산하라! | First, Count the Cost! (누가복음 14:25-33)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또 어떻게 따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릅니까? 그가 친히 사람이 되셔서 계시하신 성부의 뜻인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그는 말씀이셨고 지금도 말씀이십니다. 말씀이신 그가 천지를 지으셨고, 지금도 만물을 붙드십니다. 그런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중심적인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자 안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영생의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은 하늘의 보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감추고 있는 밭입니다.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이 밭을 사십시오. 기쁨으로 가서 모든 것을 팔아 이 밭을 사십시오.

죽음보다 강한 이(The Almighty Power Even Over Death)
코비드(COVID-19)로 온 나라는 물론 온 세계가 유례없는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재해나 질병도 그렇지만 팬데믹(pandemic)이 유독 고약한 것이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단절시킵니다. 두려움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각자의 발 앞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망에 대한 두려움때문입니다. 팬데믹(pandemic)이 오기 전이라고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여러가지 것들로 애써 외면하면 그냥저냥 회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치는 않지만 피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한 편지에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일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개인의 출생이라는 사실만큼 분명한 사실은 개인의 죽음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그 외 모든 것은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준비한다는 말입니까? 죽음의 방법? 죽을 장소? 그 순간을 함께 맞을 사람? 아닙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원한 심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죽음 이후의 심판을 준비합니까? 죽음을 이기신 이, 죽음 보다 강하신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의 죄로 인한 영원한 죽음과 심판을 다 친히 치르신 그분의 승리와 부활의 권세아래로 피하는 것입니다. (요일 2:1-3)
여기 사망을 이기신 이가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성취하실 일의 그림자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어린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눅 8:54)
이는 다름 아닌 장차 오셔서 발하실 말씀의 그림자입니다. 영광중에 다시 오실 그 때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 있는 모든 자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생명으로, 그리스도 밖에서 잠자던 자들은 멸망으로 각자의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요 5:28-29)
예수의 십자가 구속과 의의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권위가 되어 사는 반역의 삶에서 돌이켜 예수를 주로 믿고 그의 뜻을 배우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