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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詩詩(오시시) 오늘 읽은 시가 최고의 시

오詩詩(오시시) 오늘 읽은 시가 최고의 시

By the3rdpen

매일 저녁 마음에 드는 시를 한편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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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오詩詩(오시시) 오늘 읽은 시가 최고의 시Jan 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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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1
저문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저문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Jan 21, 202201:31
우체통에게. 조수옥

우체통에게. 조수옥

우체통에게. 조수옥


기다림의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대 몸속에 아직 차오르지 않는
꽃대의 빈 속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바람의 쓸쓸한
안부를 빈 가슴으로 적셔보는 일입니다
무수한 날이 별똥별처럼 떨어질 때
아직 봉인되지 않는 입술은 부르터
바람인 듯 쉬 닫히지 않습니다
직립의 사무침이 한 곳에서
기다림으로 붉게 꽃피울 수 있는 것은
깜깜함이 온통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나요
마음의 모퉁이를 서성이던 날들이
발신음으로 떨고 있지는 않나요
기다림은 비어있는 자리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비워놓은 그대 손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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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내부는 빈 자리가 아니라, 비워 놓은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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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31, 201902:06
모르는 기쁨. 김이듬

모르는 기쁨. 김이듬

모르는 기쁨. 김이듬


해운대 바다야, 아니 바다 아니고 바닷가야. 작은 여자가 자기 머리칼을 한 묶음 손으로 쥔 채 몸을 숙이고 모래밭에서 한참 동안 뭔가를 찾고 있어. 그녀에게 뭘 그리 열심히 찾고 있냐고 물어보았지. 몰라도 된다고 하네. 나는 그녀가 그 백사장에서 썩어서 하얗게 바랜 애인의 유해를 찾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에, 뭐하러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적고 있나, 몰라도 된다고 나는 내게 말하지. 내 생각의 절반 이상은 몰라도 되는 생각, 억지스런 상상. 난 눈을 질끈 감아보지. 보이지, 캄캄한 심해의 눈 없는 물고기처럼 비로소 나는 활발해지지. 죽은 나의 사람들이 지하 언덕에서 지느러미로 춤추며 나를 건드려. 나는 출렁거리지. 돌멩이도 노래하고 저녁도 낄낄거리네. 멈추지 않는 슬픔, 검은 파도, 도저히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해. 금이 간 찻잔 같은 얼굴로 나는 웃고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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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바랬어도 노래하며 낄낄거리는 애인의 유해. 나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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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30, 201902:29
아아,. 박소란

아아,. 박소란

아아,. 박소란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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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의 짐승, 그 뾰족한 송곳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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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9, 201901:55
슬픔의 빛깔. 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김민자

슬픔의 빛깔. 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김민자

슬픔의 빛깔. 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김민자


반짝이는 것들에게는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어


길을 걷다 보면 늘
온전한 것보다
부서지고 깨진 것들
훨씬 반짝거려


강물이 그렇듯 반짝이는 것도
부서지고 깨진 돌멩이
강바닥에 모여 있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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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삶의 바닥에 알지 못하는 슬픔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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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8, 201901:10
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 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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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굴곡을 기억하는 갈색 암말의 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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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7, 201901:50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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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시, 제 3의 펜이 되고 싶어 눈치만 보는 어떤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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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6, 201902:12
 모노포니. 정재학

모노포니. 정재학

 모노포니* 정재학


모든 색깔을 잃고 나는 물이 되어 네게로 흐르고 있었다 난 하나의 벽이기도 했고 눈동자이기도 했고 수화기이기도 했고 손가락이기도 했고 넌 한뼘이기도 했고 틈새이기도 했고 오후이기도 했고 입구이자 출구이기도 했고 잠시라도 네게 고여 있기 위해 소나기처럼 잠이 든다 너의 그림자가 되어


아무 증명도 필요 없었다
비에 젖은 우산처럼


숨을 길게 내쉬다가 나는 그만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모두 건반이 되고 너는 한 음 한 음 정성껏 연주한다 잠시라도 네게 고여 있고 싶었지만 낮은 음으로 너무도 빨리 흘러 너는 먼발치에 있었고 네가 누르는 높은 음역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나는 더이상 흐르지 못했다 내 몸은 증발하기 시작하고


너는 나의 모든 음을 듣지 못하고
나도 나의 음을 더이상 듣지 못하고


*monophony, 화성이 없는 단선율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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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르는 높은 음역이 닿지 않는 낮은 음에 누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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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5, 201902:32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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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톳불 타닥거리는 소리와

눈 쌓이는 소리와

불 길에 달아오른 손과

기침소리와

기차소리가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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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4, 201902:26
반성 16. 김영승

반성 16. 김영승

반성 16.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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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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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3, 201901:01
길. 윤동주

길. 윤동주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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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을 찾는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푸른 하늘은 언제나 부끄러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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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2, 201901:34
명함. 함민복

명함. 함민복

 명함. 함민복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

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

길의 명함은 이정표다

돌의 명함은 침묵이다

꽃의 명함은 향기다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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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명함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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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1, 201901:08
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이가림

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이가림

 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이가림


송코이 강가 마을에서 연초록 풀잎으로 태어난 손, 땡볕에 그을린 웃음 깔깔거리며 고무줄놀이 하던 손, 바구니 가득 망고를 따던 손, 한 모금 처녀의 샘물을 움켜쥐던 손, 불타는 야자수 그늘 아래 물소를 몰던 손, 느닷없이 M16 총알의 탄피가 스쳐간 손, 칼에 찢긴 손, 밧줄에 묶인 손, 코브라의 목을 조른 손, 송장을 불태운 손, 빵과 옷을 훔친 손, 가짜 입국사증과 약혼반지를 바꾼 손, 피의 강을 헤엄쳐온 손, 대양에 던져져 살려달라 살려달라고 외친 손, 어머니 사진을 찢어버린 손, 아아, 마침내 남의 땅 구정물통에 빠진 손, 인천 신포동 술가게에 팔려온 손, 악어 잔등보다 더 거친 손, 내가 입 맞추고 싶은 거룩한 슬픈 삶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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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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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0, 201902:15
신문. 유종인

신문. 유종인

 신문. 유종인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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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문이 전하는 또다른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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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9, 201901:19
슬픔은 슬픔에게. 박서원

슬픔은 슬픔에게. 박서원

슬픔은 슬픔에게. 박서원


슬픔은 슬픔에게 던져
주어라
헤아리지 말고
해를 바라보며 탄식하지
말고
봄이면 꽃나무
여름이면 장마
겨울에는 바람 속에 눈꽃 속에
온몸을 띄워라
사시사철 우는 새는
바보, 바보, 바보
구름은 눈물, 눈물,
콧물,
터지는 아픔은
두고두고 아껴 쓰지 말고
아픔에게 던져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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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아픔도 바람처럼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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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8, 201901:19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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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하는 애국가 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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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7, 201901:47
풍장(風葬) 1 . 황동규

풍장(風葬) 1 . 황동규

풍장(風葬) 1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튓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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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이불 삼아

옷과 전자시계와 구두와 양말을 말리는

생의 마지막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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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6, 201902:36
연습. 최승자

연습. 최승자

연습. 최승자


한잠 자고 일어나 보면
당신은 먼 태양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어 얼마 뒤, 불편한 안개 뒷편으로
당신은 어 엉거주춤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낯설게,
시체 나라의 태양처럼 차갑게.
나는 그 낯설고 차가운 열기에
온몸을 찔리며 포복한 채
당신에게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거북스런 안개가 걷히고
당신과나는 당당하게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당신이 또 날 죽이려는 음모를 품기 시작한다.
뒤에다 무엇인가를 숨기고서
당신은 꿀물을 타 주며 자꾸만 마시라고 한다.
나는 그게 독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받아 마신다.
나는 내 두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빠져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장난이
내게는 얼마나 무서운 진실인가를 모르는 체한다.


당신이 모르는 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게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모르는 체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딧물이 벼룩을 낳고
벼룩이 바퀴벌레를 낳고 바퀴벌레가 거미를 낳고……
우리의 사랑도 속수무책 거미줄만 깊어 가고,
또 다른 해가 차가운 구덩이에 쳐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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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물과 독물 사이,

바퀴벌레와 거미 사이,

장난과 진실 사이,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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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5, 201902:44
 내 마음의 새. 이태수

내 마음의 새. 이태수

 내 마음의 새. 이태수


내 마음 깊은 깊이에
새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울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는
눈멀고 말라비튼 귀머거리
새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눈보라 흩날리고
얼어붙은 내 마음 허허벌판에
날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기막힌 새 한 마리,
새 한 마리의 캄캄한 마음이 살고 있다.
강물 풀리고 새 아침이 밝아올 때
단 한 번 울고 오래오래 노래할,
눈뜨고 귀가 트이는 그 시각을 위해
나의 새는 뼛물 말리며
웅크리고만 있다.
가혹한 비상의 꿈을 꾸며
새 하늘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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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마음, 그래도 비상의 꿈을 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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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4, 201901:35
하현달. 박덕규

하현달. 박덕규

하현달. 박덕규


너는 참 이상한 꽃이야.


잠결에 어린 누이가 뜰에 내린 어둠을 쓸고 있다. 발목에 이는 덜 깬 바람이 흐느적거리며 다시 어둠의 일부가 된다. 치마폭에 갇혀서 나의 누이는 밤마다 꽃밭을 가꾸자고 한다. 물안개를 뿜으면 꽃들은 조개처럼 입을 오므린다. 뜰에 가득히 꽃잠을 자다가 나비잠을 자다가 간밤엔 초경으로 가슴 팔딱이던, 오오라


네가
지상에 처음인 그
입술 작은 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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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에 내린 어둠에 핀 작은 꽃. 

하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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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3, 201901:32
빈집. 기형도

빈집. 기형도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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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랑에 빠져

흰 종이가 무서운 남자의 절망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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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2, 201901:28
지리산의 봄. 고정희

지리산의 봄. 고정희

지리산의 봄. 고정희

-뱀사골에서 쓴 편지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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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휘감고 있는 거대하고 찬란한 빛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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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1, 201902:32
북해의 억새. 마종기

북해의 억새. 마종기

북해의 억새. 마종기


정확히는 해안이 아니었어.
북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능선,
그 언덕에 핀 지천의 은빛 억새꽃이
며칠째 메아리의 날개를 내게 팔았지.
저녁 바람을 만나는 억새의 황홀을 정말 아니?


그래도 가을 한 자락이 황혼 쪽에 남았다고
암술과 수술을 구별하기 힘든 억새꽃이
뺨 위의 멍 자국만 남은 내게 다가와
만발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왜 오래 장소에만 집착하며 살아왔는지,
내가 사는 곳에는 사철 열등감만 차 있고
눈이 올 듯 늘 어둡고 흐려야만 안심을 했지.
그래서 순천에서 만난 억새는 놀라움이었어.
북해에 살던 그 풀들도 친척이 된다는 말,
얼마나 내 묵은 심사를 편하게 해주었던지

나는 이제 아무 데나 엎드려 잠잘 수 있다.
하루 종일 자유롭게 길 떠나는 씨를 안은 꽃,
꽃이라 부르기엔 눈치 보이던, 북해의
외딴 억새도 고향의 화사한 피의 형제라니!
저녁이면 음정이 같은 메아리가 된다니!

변하지 않는 시야에 서 있는 귀향의 끝,
평범하게 말없이 살자고 약속했던 그대여,
끝없는 추락까지 그리워하며 잠들던 그대여,
나도 안다, 우리는 아직 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내가 찾던 평생의 길고 수척한 행복을 우연히
넓게 퍼진 수억의 낙화 속에서 찾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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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처럼 만발한 집착, 

장소에 집착하지 않는 바람,

아무데나 엎드려 잠잘 수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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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0, 201902:49
물속에서. 진은영

물속에서. 진은영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 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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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서 하루를 보냈으면 싶은 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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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9, 201902:12
옛 마을을 지나며.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김남주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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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감나무 끝을 올려다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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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8, 201900:39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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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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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7, 201901:13
마지막 눈이 내릴 때. 문충성

마지막 눈이 내릴 때. 문충성

마지막 눈이 내릴 때. 문충성


첫눈이 내릴 때 연인들은

만날 약속한다 공원에서

카페에서 서점에서 뮤직 홀에서

인생은 연극이니 극장 앞에서

만나 연애를 하고 더러는

헤어지고 가볍게 그래

마지막 눈이 내릴 때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허연 머리칼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눈송이

눈송이는 떨어질까

차가운 손 마주 잡고 눈물 글썽이며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말없이

눈 내리는 공동묘지 근처

아니면 인생은 연극이니 극장 앞에서

아니면 이젠 없어진 뮤직 홀에 앉아

나직이 드뷔시나 들으며

마지막 눈 소리나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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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눈이 내릴 때, 

당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를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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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6, 201901:26
얼굴. 김혜순

얼굴. 김혜순

얼굴. 김혜순


당신 속에는 또 하나의 당신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은 당신의 몸을 안으로 당당히 당겨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손톱은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려들고, 당신의 귓바퀴 또한 당신의 몸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들고 있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당겨 잡은 그 손을 놓는 순간 당신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겁니다


당신의 얼굴은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모습 그대로 굳어져 있습니다 가끔 그 얼굴이 당신 밖의 내 얼굴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당신의 두 눈동자 속에서 나를 내다보는 당신 속의 당신을 내가 느끼기도 하지만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당겨 잡은 그 손을 놓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팽팽히 당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그 긴장을 견디느라 이제 주름이 깊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은 또 얼마나 힘이 센지 내 속의 내가 당신 속으로 끌려 들어갈 지경입니다


당신은 지금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치즈를 손에 들었습니다


내 속의 나는, 치즈는 우유로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 우유는 어느 암소 속의 암소가 내뿜은 걸까 고민합니다


혹 당신이 멀리 떠나 있어도 당신 속의 당신은 여기에 또 있습니다 나는 당신 속의 당신을 돌려보내지도, 피하지도 못합니다


아마 나는 부재자의 인질인가 봅니다


내 속의 내가 단단히 나를 당겨 잡고 있는 동안 나 또한 살아 있을 테지만 심지어 나는 매일 아침 내 속의 나로 만든 치즈를 당신의 식탁 위에 봉헌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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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속의 당신,

당신 속의 나,

내 속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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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5, 201903:03
차가 막힌다고 함은. 김연신

차가 막힌다고 함은. 김연신

 차가 막힌다고 함은. 김연신

차가 막힌다고 함은, 도로에 차가 많아서, 아니다. 도로의 수용 능력보다 차의 대수가 많아서, 아니다. 도로의 표면적보다 차의 표면적이 많아서, 이제는 분명하다. 일정한 구간에서 차들의 표면적의 합이 도로의 표면적의 합에 가까이 도달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차들의 표면적의 합과 차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필수 여유 공간의 합이 도로의 표면적의 합을 초과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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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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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4, 201901:26
留別 2. 복거일

留別 2. 복거일

 留別 2. 복거일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끊긴 인연의 실을 찾아

저승 어느 호젓한 길목에서
문득 마주 서면

내 어리석음이 조금은 씻겨
그때는 헤어지지 않으리

나는 아느니,
아득한 내 가슴은 아느니.

어디에고
다음 세상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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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상에서 당신을 만난다면 다시는 놓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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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3, 201900:57
남해금산. 이성복

남해금산. 이성복

 남해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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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속에 들어가 여생을 보낸다 해도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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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2, 201900:59
별을 굽다. 김혜순

별을 굽다. 김혜순

별을 굽다.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내 가슴 속의 불가마, 매일 아침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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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 속의 불가마, 매일 아침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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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8, 201902:12
不醉不歸. 허수경

不醉不歸. 허수경

 不醉不歸.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던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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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지랑이 일렁이는 어느 봄 날의 술 자리에서 나는 너를 안았는지 너의 그림자를 안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보낸 적은 없지만 안녕하지도 못해 걷고 또 걷고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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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7, 201901:40
어느 봄날. 나희덕

어느 봄날. 나희덕

어느 봄날. 나희덕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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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꽃에 취한 게 얼마나 오래 전 일인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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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7, 201900:56
그리움은 돌보다 무겁다. 강형철

그리움은 돌보다 무겁다. 강형철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조차

미워하며 질투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가버린 뒤

고생대 지나 빙하기를 네 번이나 건너왔다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견딘다는 말을 찬찬히 읊조립니다.

무엇이 사라진 것인가요

당신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내가 지워진 것도 아닌데

심연으로 가라앉는 돌멩이

앞서 깊어가는,

저기 그리움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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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생대 지나 빙하기를 네번이나 지나도록 당신이은 보이지 않아  저는 견딘다는 말을 곱씹으며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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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6, 201901:10
농담. 이문재

농담. 이문재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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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라고 하고선, 진짜 외롭거나 정말 강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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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6, 201901:01
흰둥이 생각. 손택수

흰둥이 생각. 손택수

흰둥이 생각.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 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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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흰둥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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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4, 201901:49
어느날 애인들은. 허수경

어느날 애인들은. 허수경

어느날 애인들은.  허수경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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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애인이 보낸 편지를 받지 못해 갑자기 나이가 들어버렸고, 그 순간 마음 속에 있는 보석같은 순간들이 모두 별자리가 되어 하늘로 올랐습니다.
별이 환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 어딘가 나는 쓰러졌습니다.
그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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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3, 201901:13
나의 순간 장난감. 고형렬

나의 순간 장난감. 고형렬

 나의 순간 장난감. 고형렬


나의 순간 장난감

나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요

나를 당신의 이름 속에 묶으려 하지 말아요

당신의 길이 있으면 당신 길을 가도록 하세요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지 말아요

우리는 너무 오래 서로의 이름을 불렀어요

나의 이름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싶어요

그리고 아직 분명한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도 어떤 망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는 필요를 버리고 싶은가봐요

내가 어떤 미명의 약속 외에 구름과 바람같은

또다른 아침의 꽃으로 왔다 할지라도

이제 우리는 만나기 전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봐야 해요 이 말도 잊어야 하지만 

현재가 아득한 과거의 현재이길 바라요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 애쓰지 말아요

이제 당신은 나에게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나를 스스로 혼자 있게 놓아줘요

조용히 담 밑에서 햇살을 받게 해줘요

해가 지는 도시 , 서향의 한 정류장에서 나는

당신에게 너무 오래된 말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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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순간 한순간이 장난감처럼 가볍다. 

아니, 그렇게 가볍길길 바라지만 실은 너무 오래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나 서로를 묶으려 하거나 망각이 필요해 혼돈 속으로 밀어넣고 싶은 시간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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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3, 201901:53
비둘기호. 김사인

비둘기호. 김사인

 비둘기호. 김사인


여섯 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는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끔 나왔네.

커다란 여섯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눈을 보냈네.

섧고 비참해 현기증이 다 났네.


아버지가 사무실로 불려간 뒤

아버지가 맞는 상상을 하며

찬 시멘트 벽에 기대어 나는 울었네

발은 시리고 번화한 도회지 불빛이 더 차가웠네.


핼쑥해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역사를 빠져나갔네.

밤길 오십리를 더 가야 했지.

아버지는 젊은 서른여덟 막내아들 나는 홑 아홉 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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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 늙어 버린 아홉살의 설 풍경.

‘여섯살이어야 하는’ 나는 차표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온통 불안해서 식은 땀을 흘리고 목과 어깨가 가렵고 오줌도 찔끔 나왔다. 사실 아홉살인 나의 삶이 비참하고 서럽고 억울하지만 인생이 이런 것인 줄 그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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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3, 201902:21
대관령 옛길. 김선우

대관령 옛길. 김선우

 대관령 옛길. 김선우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화주火酒―


 싸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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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의심에 쌓여 대관령 옛 길을 천천히 오른다. 

빙하처럼 차가운 오래된 대관령을 정초부터 오르는 까닭은 지난 해 마음을 어지럽힌 어떤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고, 혹은 새해에 세운 큰 결심을 다지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추위를 막기 위해 털어 넣은 독주가 눈물이 되어 툭 털어지는 대관령길.

우린 모두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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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2, 201901:46
노숙. 김사인

노숙. 김사인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일구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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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의 시들은 땅 위에 서 있다. 

아주 거칠고 날 것의 냄새를 풍기지만 역설적으로 그것만큼 삶을 잘 표현하는 시도 없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여’라는 싯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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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1, 201901:27
의자에 앉아 있는 눈사람. 박형준

의자에 앉아 있는 눈사람. 박형준

 의자에 앉아 있는 눈사람. 박형준

 

폭설이 내렸다

며칠이 지나도 녹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버려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는 때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저녁 햇살에 반쯤은 몸을 내주고 있었다

일생토록 자신의 등으로

주인의 몸무게를 받아주던 늙은 조랑말처럼

무릎을 꺽고 풀썩 땅에 주저 앉을 것 같았다

거기, 눈사람이 앉아 있었다

응달에서 천천히 녹아가며

버려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아이가 처마 끝에 매달리 고드름을 꺽어다

떨어진 눈사람의 코를 붙이고 있었다

의자의 발밑으로

눈사람에게서 떨어진 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데,

아이는 눈사람의 코를 만지고 있었다

일생을 다하고 곧 의자로서 생명이 사라질

낡은 의자를 위한, 그런 경건한 저녁이

웅덩이에 그림자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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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의 시는 애달프고 아리고 처연하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등지고 은둔한 채 먼 산을 바라보는, 아주 창백하고 가녀린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외롭지만 세상을 다시 맞대는 것이 두렵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더 끔찍스럽다 생각한다.

박형준의 시를 읽으면, 읽는다기 보다 들이 마시는 것에 가깝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이 전해진다.

호오하고 숨을 내쉬면 하얀 온기가 빠져 나오는 냉랭한 어디. 한편에 낡은 의자가 있고, 그 의자 위에 녹는 듯 언 듯 오래된 눈사람이 있다. 아이가 고드름으로 코를 붙여 보지만 눈사람의 생명을 연장할 수는 없다. 의자도 눈사람도 웅덩이처럼 사라질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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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 201901:47
구름. 김소월

구름. 김소월

구름. 김소월

저기 저 구름을 잡아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
밤이면 새캄한 저 구름을.
잡아타고 내 몸은 저 멀리로
구만리(九萬里)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그대여, 들으라 비가 되어
저 구름이 그대한테로 내리거든,
생각하라, 밤저녁, 내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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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 잡아타고 그대 품속에 가려오.

혹 가지 못한다면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니, 그것이 나의 눈물이라 생각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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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 201901:07
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김성규

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김성규

 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김성규



지뢰밭 가운데서

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적도를 따라 걸어가는 중입니다

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

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

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

너는 왼쪽으로 걸어

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

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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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로 가면 만날 수 있다는 확신, 

태양이 져도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 불변의 진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에서는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지구에서 가장 길고 뜨거운 불변의 선, 

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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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시에서 읽은 시는 https://the3rdpen.home.blog 에서 볼 수 있습니다.


Feb 08, 201901:03